Andreas Nikolaus "Niki" Lauda
안드레아스 니콜라우스 "니키" 라우다
생년월일 | 1949년 2월 22일 |
국적 | 오스트리아 (빈) |
사망 | 2019년 5월 20일 (향년 70세) |
소속팀 | STP 마치 레이싱 팀 (1971 ~ 1972) 말보로 BRM (1973) 스쿠데리아 페라리 (1974 ~ 1977) 브라밤(파르말라트) 레이싱 팀 (1978 ~ 1979) 말보로 맥라렌 (1982 ~ 1985) |
월드 챔피언십 | 3회 (1975, 1977, 1984) |
그랑프리 우승 | 25회 (25/171, 14.62%) |
그랜드 슬램 | 1회 (1976 벨기에 GP) |
내 친구 니키 라우다는 스트릿 파이터였고, F1에서 빛나는 재능을 보여줬습니다.
- 존 왓슨 (F1 드라이버 / 팀동료)
[Chapter 01.] 성장과 데뷔 (1971 ~ 1973)
니키 라우다는 1949년 오스트리아 빈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다수의 제지 공장을 운영하는 '한스 라우다'로 성공한 가문이었으며, 이는 라우다에게도 안정적인 사업가의 길이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1966년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독일 그랑프리를 관전한 니키 라우다는 레이스에 매료되었고 그렇게 레이서로서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라우다가 가업을 잇길 바랐던 부모님은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라우다는 레이서로서의 꿈을 굽히지 않았고, "가문의 물건을 일체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집을 나가라."는 말을 듣고 레이스를 위해 가문과 의절하게 되었다. 이렇게 집을 나온 라우다는 유럽 F2 등에서 활약하다가 1971년 9월 맥스 모슬리(Max Mosley, FIA 전 회장)가 대표로 있었던 마치(March)에 지참금을 가져가는 조건으로 데뷔하게 되는데 이때 은행에서 자신의 생명보험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지참금을 마련했다. 그는 이렇게 F1 드라이버로서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
많은 것을 포기한 끝에 F1에 데뷔한 라우다였지만 마치에서의 그의 성적은 좋지 못했다. 1971년에는 단 1경기에만 나섰고, 1972년 12경기에 나섰지만 포인트를 획득하지 못했다. 자금이 부족했던 마치는 팀 동료였던 로니 피터슨만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니키 라우다에게 해고를 통보하였다.
미아의 위기에 놓인 니키 라우다는 BRM 팀에서 지참금을 가져오는 조건으로 합류하며 드라이버 시트를 확보했다. 1973시즌 BRM에서 14경기에 나서 2포인트를 기록하며 17위에 랭크되었다. 뛰어난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의 커리어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6라운드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라우다는 3위를 기록하며 인상적인 레이스를 보여주고 있었으나 기어박스 고장으로 인해 리타이어 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페라리보다 앞서 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엔초 페라리가 그의 실력을 알아본 듯했다.
[Chapter 02.] 꽃핀 재능 그러나 닥친 재앙 (1974 ~ 1977)
1974시즌 BRM 팀 메이트였던 클레이 레가조니가 친정팀이었던 페라리로 이적하게 되는데 그를 영입한 엔초 페라리가 레가조니에게 니키 라우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고 레가조니는 그의 실력에 의심이 없었기에 매우 긍정적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엔초 페라리는 1974년 니키 라우다를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드라이버로 영입한다. 페라리의 팬들은 그의 이적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이렇다 할 결과를 낸 시즌이 없는 무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우다는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듯 1라운드 아르헨티나 그랑프리부터 팀 메이트 레가조니를 제치고 2위를 기록했다. 2, 3라운드 피니시하지 못하며 노포인트에 그쳤지만, 4라운드 스페인에서 레가조니와 함께 페라리의 원투피니시를 이끌어내며 F1에서의 첫 그랑프리 우승에 성공했다. 이후에는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또 한 번 우승하며 38포인트로 드라이버 랭킹 4위를 기록했다.
라우다가 두각을 나타낸 이후 1975시즌 높은 성적이 예상되었지만, 처음 4라운드에서 5위를 기록하는 등 좋지 못한 출발을 보였다. 갑작스런 부진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페라리가 새 시즌을 앞두고 새로운 레이스 카(312T)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개발이 지연되어 시즌 출발부터 새로운 레이스 카를 투입하지 못한 탓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312T가 5라운드 모나코 그랑프리부터 투입되었고, 새로운 레이스 카를 탄 니키 라우다는 모나코, 벨기에, 스웨덴 그랑프리를 모두 우승했고 네덜란드에서 제임스 헌트에게 우승을 내준 후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5경기만에 42포인트[** 1975년 월드 챔피언십 2위 피티팔디 45포인트 **]를 획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남은 그랑프리에서 니키 라우다는 22.5포인트를 더 획득해 생애 첫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1976시즌은 니키 라우다와 맥라렌 소속 제임스 헌트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유명하다. 전년도 챔피언 라우다는 시즌 초반부터 강력한 모습을 보이며 큰 점수차로 앞서 나갔지만, 헌트는 끊임없이 그를 추격했다. 두 선수는 서로 상반된 성격을 지녔는데, 라우다는 철저한 계산과 냉철한 태도로 레이싱에 임한 반면, 헌트는 자유분방하고 감정적인 스타일을 지닌 드라이버였다. 이렇게 대조적인 스타일은 팬들의 관심을 더욱 끌어당겼다.
하지만 시즌 중반, 독일 그랑프리 니키 라우다는 그의 커리어와 인생을 뒤흔든 대형 사고를 당하고 만다. 자신의 꿈이 태동했던 뉘르부르크링에서였다. 비가 내리는 트랙에서 2번 코너에 진입한 라우다의 레이스 카가 연석에 부딪혀 중심을 읽고 펜스를 뚫고 나온 바위와 충돌하였고 발화된 레이스 카는 서킷 한가운데 서버렸다. 이때 브렛 룽거의 레이스 카가 라우다의 레이스 카를 충돌하며 라우다의 헬멧이 벗겨졌다. 놀란 동료 드라이버들(하랄트 에르틀, 가이 에드워즈, 브렛 룽거, 아르투로 메르차리오)이 레이스 카를 멈추고 불이 붙은 니키 라우다의 레이스 카로 달려와 목숨을 걸고 라우다 구출을 시작했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재빨리 구조되었지만 워낙 큰 사고였던 탓에 심각한 화상과 골절 그리고 폐손상을 입었고 니키 라우다는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돌아온건 가망이 없다는 의사들의 판정이었다. 카톨릭 신자였던 그는 신부를 불러와 임종의식인 병자성자를 받기에 이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라우다는 오른쪽 귀 대부분과 머리카락 눈썹 눈꺼풀을 잃는 등 머리에 광범위한 흉터를 입었지만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며 사고 후 6주만에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드라이버로 복귀한 것이었다. 그는 레이스에 들어가 4위로 피니시 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고 팬들은 이때부터 그를 '불사조(Phoenix)'라고 불렀다.
라우다가 부상으로 빠진 사이 라이벌 제임스 헌트는 페이스를 끌어올리고 있었고 캐나다, 미국 그랑프리를 연속으로 우승하며 돌아온 라우다와 치열한 챔피언십 경쟁을 펼쳤다. 라우다와 헌트의 포인트 차이는 단 +3점. 후지 스피드웨이 서킷에서 펼쳐지는 시즌 최종전 일본 그랑프리에서 치열한 챔피언십 경쟁을 예고하며 절정에 달했다.
일본 그랑프리 결승전. 퀄리파잉에서 라우다는 1:13.080(3위)을 기록했고 헌트는 1:12.800(2위)을 기록하며 라우다보다 앞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런데 레이스 당일. 서킷에는 물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고 레이스 중지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강행되었다. 라우다는 이 상황이 굉장히 못마땅했고 2랩을 돌던 그는 안전을 이유로 레이스를 포기해 버렸다. 이 사이 헌트는 3위를 기록하며 +4포인트를 획득했고 69포인트로 라우다가 기록한 68포인트를 단 1포인트 차로 제치고 월드 챔피언을 차지했다.
1977시즌 라우다는 페라리 소속으로 14경기에 나서 3번의 우승과 10번의 포디엄 피니시를 기록하는 등 안정된 기량으로 자신의 두 번째 월드 챔피언을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라우다는 불행했다. 좋은 성적과는 다르게 76년 일본 그랑프리에서의 결정으로 인해 페라리에서 그를 좋게 보지 않았고 페라리는 카를로스 로이테만을 데려오며 언제라도 그를 대체할 것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었기에 서로 불편한 동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챔피언에 오른 라우다는 페라리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Chapter 03.] 브라밤(파르말라트) 이적, 그리고 첫번째 은퇴 (1978 ~ 1979)
페라리와 불편한 동행을 끝낸 라우다는 고든 머레이가 디자인 한 브라밤의 레이스 카 BT46B에 매료되어 1978시즌 브라밤으로 이적한다. 브라밤의 BT46B는 일명 팬 카라 불리는 레이스 카였다. 냉각을 증가시키기 위한 [** 브라밤이 주장하는 **] 팬을 사용하여 엄청난 양의 다운포스를 만들어내는 혁신적인 레이스 카였다.
니키 라우다는 이 팬 카를 타고 16경기에 출전하여 2번의 우승 그리고 7번의 포디엄 피니시를 기록하며 44포인트를 획득 4위로 시즌을 마친다. 혁신적인 디자인과는 달리 내구성이 확보되지 않아 리타이어하는 일이 잦았던 탓이었다.
이후로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던 1979시즌 캐나다 그랑프리를 준비하고 있던 니키 라우다는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목숨 걸고 빙글빙글 도는 게 지겹다."며 레이싱에 대한 열정이 고갈된 모습이었다. 라우다는 그렇게 첫 번째 은퇴를 결정했다.
[Chapter 04.] 전설의 귀환, 세번째 월드 챔피언 그리고 은퇴 (1982 ~ 1985)
레이싱에 열정을 버리지 못한 라우다는 1982시즌 맥라렌과 계약하며 전설의 복귀를 알렸다. [** 은퇴 후 항공여객사업을 했던 라우다가 사업을 유지하기위해 돈이 필요하기도 했다. **] 맥라렌의 니키 라우다는 복귀 첫 경기 였던 남아공 그랑프리에서 4위를 차지하며 3년의 공백을 무색케한 드라이빙을 보여줬다. 3라운드 미국 서부 그랑프리에서는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이 죽지않았음을 또 다시 "불사조"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건재함을 알렸다. 이후 영국 그랑프리에서 한번 더 우승한 뒤 30포인트를 기록 5위에 랭크되며 시즌을 마친다.
무난한 복귀시즌을 치뤘던 니키 라우다는 1983시즌에 총 15번의 그랑프리에 출전해 7번을 머신 문제로 기권하였다. 2번의 포디움 피니시만을 기록한채 12포인트로 10위에 랭크된다.
1984시즌 라우다는 르노에서 이적한 알랭 프로스트와 팀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알랭 프로스트는 재능이 무르익으며 전년도 챔피언십 2위를 기록한 떠오는 신예였다. "지금까지 팀 동료와 이런 전투를 해본 적이 없었다."라고 할 만큼 라우다는 팀 메이트 프로스트와 치열한 타이틀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1984시즌 라우다는 5승을 기록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홈그랑프리인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우승이 포함되어 있었다. 프로스트는 7승을 기록하며 라우다를 능가했지만, 라우다가 결승에서 포인트권에 착실하게 살아남아 챔피언십 랭크에서 앞섰다.
최종전 포르투갈 그랑프리를 앞두고 라우다(+66)와 프로스트(+62.5)의 포인트 차는 3.5포인트 차. [** 모나코 GP가 폭우로 중단되어 모든 드라이버들이 본래의 1/2포인트만을 획득했다. 1위 알랭 프로스트 +4.5 | 2위 아일톤 세나 +3 **] 퀄리파잉이 시작되고 프로스트는 1:21.774를 기록하며 2번 그리드 출발. 라우다는 1:23.183의 좋지 못한 기록으로 11번 그리드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프로스트의 월드 챔피언이 유력한 상황.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고 "불사조"는 또다시 날아올랐다. 2번 그리드에서 출발했던 프로스트가 선두였던 넬슨 피케를 제치고 1위로 골인하며 9포인트을 획득했지만 라우다가 신들린 드라이빙을 선보이며 2위로 골인하며 6포인트를 획득. 불과 0.5포인트 차이로 라우다가 세번째 월드 챔피언이 된다.
1985시즌 라우다는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한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이 시즌을 마치고 니키 라우다는 F1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라우다는 F1 역사에서 가장 강인한 드라이버라고 생각한다. 그의 불굴의 정신력과 레이싱에 대한 헌신은 후대 드라이버들이 그를 그리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제임스 헌트와의 경쟁은 세나와 프로스트의 경쟁과 함께 F1 역사상 가장 극적인 라이벌 스토리로 남아 있으며, 두 드라이버의 대결은 2013년 영화 "러시: 더 라이벌"을 통해 다시 한번 회자되었다.
2019년 5월 20일, 니키 라우다는 1976년 사고의 여파로 폐 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